청사진/글
색채를 잃은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LK1
2017. 3. 31. 13:49
87
그렇다고 해도 그 연하의 친구와 함께 지내는 동안은 대체로 네 명의 일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잊는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자신이 네 친구에게서 노골적으로 거부당한 아픔은 그의 마음속에 늘 변함없이 존재했다. 다만 그 무렵에 와서는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진다. 어느 순간 발바닥까지 밀려오고, 어느 순간에는 멀리 가버린다.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자신이 도쿄라는 새로운 토양에 조금씩이기는 해도 뿌리를 내려 간다고 쓰쿠루는 실감했다. 고독하고 변변치 않기는 하지만 새로운 생활이 형성되고 있었다. 나고야의 나날들은 점차 과거의 것으로, 얼마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변해 갔다. 그것은 분명 하이다라는 새로운 친구가 가져다준 진보였다.
149
아무튼 하이다의 존재가 사라져 버리자 그 친구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였는지, 하루하루의 생활에 얼마나 풍성한 색채감을 주었는지 쓰쿠루는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다와 나누었던 온갖 이야기들, 그 특유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그리움과 함께 떠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때로 읽어 주던 책들, 그가 해설하는 세상 일들, 독특한 유머, 적확한 인용, 그가 만들어 주는 음식, 끓여주는 커피. 하이다가 뒤에 남겨 둔 공백을 그는 일상생활의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는데, 나는 도대체 하이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쓰쿠루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친구의 내면에 과연 무엇을 남길 수 있었을까?
229
아카가 말했다. "난 이렇게 생각해. 사실이란 모래에 묻힌 도시 같은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래가 쌓여 점점 깊어지는 경우도 있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모래가 날아가서 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어. 그 일은 어느 모로 보나 후자 쪽이야. 오해를 풀든 말든 넌 원래 그런 짓을 할 인간이 아냐. 그건 잘 알아."
291
두 번 이어서 그 면을 들은 다음 쓰쿠루는 파자마로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머리맡의 불을 끄고 자신이 가슴에 끌어안은게 깊은 슬픔이며, 결코 무거운 질투의 멍에가 아님에 새삼 감사했다. 그랬다면 어김없이 잠을 빼앗겼을 것이다.
이윽고 잠이 찾아와 그를 감쌌다. 고작 몇 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그립고 부드러운 감촉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또한 쓰쿠루가 그날 밤 감사의 마음을 품은 몇 안 되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
잠 속에서 그는 밤의 새소리를 들었다.
382
"난 두려워.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또는 무슨 잘못된 말을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냥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에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역을 만드는 일하고 마찬가지야. 그게,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의미나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약간의 잘못으로 전부 망쳐져 버리거나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 설령 완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역은 완성되어야 해. 그렇지? 역이 없으면 전차는 거기 멈출 수 없으니까.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맞이할 수도 없으니까. 만일 뭔가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면 필요에 따라 나중에 고치면 되는 거야. 먼저 역을 만들어. 그 여자를 위한 특별한 역을. 볼일이 없어도 전차가 저도 모르게 멈추고 싶어 할 만한 역을. 그런 역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거기에 구체적인 색과 형태를 주는 거야. 그리고 못으로 네 이름을 토대에 새기고 생명을 불어넣는 거야. 너한테는 그런 힘이 있어. 생각해 봐.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서 헤엄쳐 건넜잖아."
434
아무튼 만약 내일 사라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난 정말로 죽어 버릴 거야. 그는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죽든지, 또는 비유적으로 죽든지, 어느 쪽이든 그리 큰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숨을 거둘 것이다. 색채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완전히 색깔을 잃고 이 세상에서 은밀하게 퇴장할 것이다. 모든 것은 무가 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한 줌 흙덩어리일지도 모른다.
별일 아니야. 그는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일어난 일이고, 실제로 일어났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물리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감긴 시계태엽이 점점 풀어지고 모멘트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져서 이윽고 톱니바퀴가 마지막 움직임을 멈추고 바늘이 한 위치에 딱 멈춰 선다. 침묵이 내려온다. 단지 그것뿐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그 연하의 친구와 함께 지내는 동안은 대체로 네 명의 일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잊는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자신이 네 친구에게서 노골적으로 거부당한 아픔은 그의 마음속에 늘 변함없이 존재했다. 다만 그 무렵에 와서는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진다. 어느 순간 발바닥까지 밀려오고, 어느 순간에는 멀리 가버린다.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자신이 도쿄라는 새로운 토양에 조금씩이기는 해도 뿌리를 내려 간다고 쓰쿠루는 실감했다. 고독하고 변변치 않기는 하지만 새로운 생활이 형성되고 있었다. 나고야의 나날들은 점차 과거의 것으로, 얼마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변해 갔다. 그것은 분명 하이다라는 새로운 친구가 가져다준 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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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하이다의 존재가 사라져 버리자 그 친구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였는지, 하루하루의 생활에 얼마나 풍성한 색채감을 주었는지 쓰쿠루는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다와 나누었던 온갖 이야기들, 그 특유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그리움과 함께 떠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때로 읽어 주던 책들, 그가 해설하는 세상 일들, 독특한 유머, 적확한 인용, 그가 만들어 주는 음식, 끓여주는 커피. 하이다가 뒤에 남겨 둔 공백을 그는 일상생활의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는데, 나는 도대체 하이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쓰쿠루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친구의 내면에 과연 무엇을 남길 수 있었을까?
229
아카가 말했다. "난 이렇게 생각해. 사실이란 모래에 묻힌 도시 같은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래가 쌓여 점점 깊어지는 경우도 있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모래가 날아가서 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어. 그 일은 어느 모로 보나 후자 쪽이야. 오해를 풀든 말든 넌 원래 그런 짓을 할 인간이 아냐. 그건 잘 알아."
291
두 번 이어서 그 면을 들은 다음 쓰쿠루는 파자마로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머리맡의 불을 끄고 자신이 가슴에 끌어안은게 깊은 슬픔이며, 결코 무거운 질투의 멍에가 아님에 새삼 감사했다. 그랬다면 어김없이 잠을 빼앗겼을 것이다.
이윽고 잠이 찾아와 그를 감쌌다. 고작 몇 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그립고 부드러운 감촉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또한 쓰쿠루가 그날 밤 감사의 마음을 품은 몇 안 되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
잠 속에서 그는 밤의 새소리를 들었다.
382
"난 두려워.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또는 무슨 잘못된 말을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냥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에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역을 만드는 일하고 마찬가지야. 그게,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의미나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약간의 잘못으로 전부 망쳐져 버리거나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 설령 완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역은 완성되어야 해. 그렇지? 역이 없으면 전차는 거기 멈출 수 없으니까.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맞이할 수도 없으니까. 만일 뭔가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면 필요에 따라 나중에 고치면 되는 거야. 먼저 역을 만들어. 그 여자를 위한 특별한 역을. 볼일이 없어도 전차가 저도 모르게 멈추고 싶어 할 만한 역을. 그런 역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거기에 구체적인 색과 형태를 주는 거야. 그리고 못으로 네 이름을 토대에 새기고 생명을 불어넣는 거야. 너한테는 그런 힘이 있어. 생각해 봐.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서 헤엄쳐 건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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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만약 내일 사라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난 정말로 죽어 버릴 거야. 그는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죽든지, 또는 비유적으로 죽든지, 어느 쪽이든 그리 큰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숨을 거둘 것이다. 색채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완전히 색깔을 잃고 이 세상에서 은밀하게 퇴장할 것이다. 모든 것은 무가 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한 줌 흙덩어리일지도 모른다.
별일 아니야. 그는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일어난 일이고, 실제로 일어났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물리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감긴 시계태엽이 점점 풀어지고 모멘트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져서 이윽고 톱니바퀴가 마지막 움직임을 멈추고 바늘이 한 위치에 딱 멈춰 선다. 침묵이 내려온다. 단지 그것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