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진/글

농담

LK1 2013. 7. 2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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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희가 왜 그렇게 나한테 박수를 치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생각해 봐. 전쟁이 터지면 어쨌거나 내가 총을 쏘게 되는 건 바로 너희들일 텐데!"
  우리에게 목소리를 높여 야단 한번 친 적이 없는─그래서 나중에는 전속이 되기까지 한─이 순진한 존재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당과 동지들에게 나를 연결해 주었던 끈이 이제,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내 손에서 스르르 풀려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의 길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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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잘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 낸다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의 본질, 아니─아주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면─나중에 루치에가 내게 어떤 사람이 되었는데 그 루치에의 본질, 나는 그것을 한순간에 즉시 깨달았고 느꼈고 보았던 것이다. 마치 누가 밝혀진 진리를 가져와 보여 주듯이, 루치에가 내게 가져와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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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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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째서 나는 어른으로 심판받고 추방되고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선언되고 탄광으로 보내지고 그렇게 모든 데에서 어른이어야 하면서 사랑에서만은 어른이 될 권리도 없고 이렇게 미숙해서 모든 창피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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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부터 언제나 나는 엄마가 하늘에 계시다고 상상한다. 그렇다고 내가 하느님이니 영원한 삶이니 하는 것들을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그것은 어떤 이미지다. 이런 이미지를 떨쳐 버려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고아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

305
  내가 얼마나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가 하면, 누가 자기는 무어가 좋고 무어가 싫다는 등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으면 그것을 절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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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여자가 자기 정부에게 남편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품위 때문이라든가 아니면 정말 순수해서인 경우는 아주 드물고, 다만 정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런 걱정을 없애 주면 여자는 고마워하면서 훨씬 마음이 편해지고, 무엇보다도 특히 대화의 소재가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언가 이야기할 거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에게는 남편이란 꿈 같은 주제, 그녀가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주제, 자신이 전문가로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주제를 제공해 주는 것이며, 어찌 되었든 사람은 누구나 전문가로서 행세하고 자신을 내세우기를 즐기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내게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심시켜 주자 헬레나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파벨 제마네크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옛일을 회상하는 가운데 감정이 고조되어서는 제마네크에 대해 아무런 부정적인 이야기도 덧붙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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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그러나 이 증오를 순수히 추상적인 원리들, 불의, 광신, 야만성에 집중시켜 보라! 아니면 당신이 인간의 원리 자체마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인류 전체를 한번 증오해 보라! 이런 증오는 너무나 초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

465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와 제마네크 사이의 유사성은 그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나와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유사성은 보다 심층적이고 우리의 운명 전체를 포괄하고 있었다. 브로조바 양과 그녀 세대에게 있어서 우리는 서로 맹렬하게 대치하고 있을 때마저도 서로 닮은꼴인 것이었다. 나는 문득, 내가 당에서 축출당했던 그 사건을 불가피하게 그녀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그것이 아득히 멀고 너무도 문학적인 이야기로만 비추어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그렇다, 이것은 너무도 많은 삼류 소설에서 수도 없이 다루어진 주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두 사람에게 똑같이, 내 생각들이나 그의 생각들이나, 내 태도나 그의 태도나(모두 한결같이 뒤틀리고 기형적인) 양자 모두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었다.

481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당신은 정말 몰라, 나를 그저 연애 사건이나 만들려 드는 하찮은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지, 당신이 나의 운명, 나의 삶, 전부라는 걸 당신은 상상도 못 하지, 어쩌면 당신은 여기에서 하얀 천에 덮인 나를 발견할지도 몰라, 그때 당신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죽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아니면, 오오 어쩌나,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당신이 도착하고 그래서 나를 다시 구해 낼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내 곁에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쏟겠지, 그러면 나는 당신의 손을, 머리를 어루만지고, 당신을 용서할 거야, 모든 것을 용서할 거야…….

483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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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517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왜 왕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